언어학의 숲

삶을 그리는 즐거운 언어학.

  • 2024. 5. 14.

    by. banan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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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포스팅은 세계 맥주 이야기, 포터에서 스타우트까지 그 유래와 역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포터는 양조의 역사에서 주축적인 역할을 했지만 놀랍게도 최근까지 포터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포터는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의 양조 산업의 모습을 수공업에서 산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와 발틱 연안국, 짜르 치하의 러시아까지 수출되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주조되는 에일로 포터를 기억해도 좋을 것입니다.

      beer
      런던의 새로운 맥주

      런던의 새로운 맥주, 포터

      런던 양조업자들을 위한 전환점은 1722년 찾아왔습니다. 랄프 하우드라는 상업적인 양조업자가 엔타이어 버트(Entire butt)라는 술을 만들었는데, 맛이 진짜(쓰리 쓰레즈)와 흡사했습니다. 그는 맥주를 캐스크 1통(butt) 단 위로 이스트 런던의 퍼브에 공급했습니다. 당시 퍼브의 주인들은 쓰리 쓰레즈를 만드느라 고역을 치뤄야 했습니다. 지하저장고에서 세가지 맥주를 섞는 것만 해도 중노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엔타이어는 이러한 수고를 덜어주었습니다. 섞을 필요가 없이 캐스크 단위로 포장돼서 편리했습니다. 더구나 엔타이어는 값이 훨씬 쌌기 때문에 맛과 가격과 편리함으로 쓰리 쓰레즈의 훌륭한 대체품이었습니다. 런던 선술집 주인들의 반응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특히 싼 값은 새로운 맥주의 대중적인 확산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랄프 하우드가 처음으로 엔타이어를 만든지 4년 후 런던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고국으로 부치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1726년 11월 26일 : 이 나라에선 맥주 밖에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맥주는 여러 가지 품질로 나뉘어 진다. (중략) 또 다른 종류는 포터로 불린다. (중략) 이 맥주의 대부분을 노동자 계층이 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하고 독한 맥주로 지나치게 마시면 효과가 와인과 맞먹는다. 포터는 1포트에 3펜스이다. 런던에 있는 많은 에일 하우스들이 이 맥주 외에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중략) 페일 에일은 1병에 1실링에서 1실링 6펜스이다." 페일 에일은 빈곤한 노동자 계층이 즐기기에는 너무 버거운 사치였습니다.

      포터는 런던의 새로운 맥주에 주어진 별명이었습니다. (랄프의 엔타이어 버트는 물론 그 이후 등장한, 유사한 섞은 맥주를 통칭함) 포터의 주 고객은 당시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과 함께 증가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이었습니다. 빠르게 증가하는 노동자 계층의 맥주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1730년대에 이르면 이미 런던의 작은 선술집이나 랄프 하우드와 같은 작은 상업적 양조업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산업이 양조업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본을 갖고 있는 기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포터를 위한 양조장을 새로 지었고, 새로운 양조장은 산업혁명의 신기술과 과학적 진보로 무장했습니다. 최초의 기업가는 사무엘 휘트블드였는데, 그는 1742년 올드 스트리트에 소규모의 양조장을 세운 이후 3년 이내에 바비칸에 대규모의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1812년 생산량을 보면 당시 포터가 만들어낸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휘트브레드 2세는 년간 122,000 배럴을 생산하고 있었고, 바클레이 퍼킨스는 270,000 배럴, 뮤 레이드는 180,000 배럴, 트루만 핸버리는 150,000 배럴을 생산했습니다. 대략 1세기 전 랄프 하우드가 21,000 배럴을 생산한 것과 비교하면 혁명적이라 할만 했습니다. 더 이상 포터는 작은 선술집에서 만든 술이 아니라, 그것은 신기술과 과학의 산물이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이었습니다. 자본에 의해 도시에 수용된 노동자 계층이라는 산업 시대의 새로운 계급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스타우트'의 유래

      18세기의 포터는 페일과 브라운 몰트로 만든 색이 짙은 맥주였습니다. 색의 짙은 정도는 다양했는데, 여러 맥주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몰트의 단맛이 강해 호프가 많이 들어갔는데, 몰트의 단맛이 강했던 건 초기에 포터가 당의 알코올 전환도가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몰트 당이 그대로 맥주에 남는 것을 뜻했지만 남은 당은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 계층에게는 잃어버린 에너지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알코올 강도는 측정된 것이 없지만 대략 부피로 6%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보다 더 강한 버전은 '스타우트 포터(Stout poter)'로 알려졌습니다. 스타우트라는 표현은 18세기 당시 양조장에서 만든 가장 독한 술을 일컫는 말로 색깔과는 무관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포터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쇠퇴하고 가장 강한 포터만이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강한 포터를 가리키던 스타우트(포터)가 당시의 맥주 특성과 함께 하나의 맥주 종류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쓰는 스타우트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검은색의 포터가 등장한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양조업자들은 브라운 몰트보다 페일 몰트를 이전보다 많이 사용했습니다. 발효성 당이 나무로 건조한 브라운 몰트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페일 몰트는 색이 옅기 때문에 짙은 색을 연출하기 위해 다른 첨가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러저러한 첨가물들을 쓰던 중 해결 방법이 나왔는데 그것은 1817년 다니엘 휠러가 만든 몰트 건조기였습니다. 그의 새로운 건조기는 커피 볶는 기계의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덕분에 약 210도의 고열로 몰트를 건조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몰트는 짙은 갈색 또는 검은색을 띠었는데, 발효성 당이 거의 없었으나 소량만 첨가해도 맥주를 신비하게 변화시켰습니다. 항상 일정하게 검은 색깔을 내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운 맛이 추가되었습니다. 약간의 훈제한 듯한 맛과 함께 쓴 초콜릿과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포터나 스타우트를 마실 때 기대하는 맛이었습니다.

       

      특허 몰트(Patent malt)로 불린 새로운 몰트는 포터 양조산업 역시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휘트브레드는 휠러의 건조기가 발명되자마자 그 잠재력을 간파했습니다. 1817년 그 해 전문 몰트 제조사인 프렌치 & 주프사는 바비칸 양조장 바로 옆에 특허 몰트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그날 그날 양조장에 특허 몰트를 공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클레이 퍼킨스는 1820년부터 색을 내는 첨가물 대신 다크 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반 포터는 오늘날의 모습을 완성합니다. 여러 가지 맥주를 섞어 만들어서 색과 맛이 다양했던 포터는 이제 하나의 매쉬(Mash)에서 만든 검은 맥주가 되었습니다. 또한 섞을 때와는 달리 잘 숙성된 맛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볶은 곡식과 많은 양의 호프를 사용해서 쓴맛과 함께 호프와 다크 몰트의 맛을 띠었습니다.

       

      포터에서 스타우트까지

      포터는 양조의 역사에서 주축적인 역할을 했지만 놀랍게도 최근까지 포터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포터는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의 양조 산업의 모습을 수공업에서 산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와 발틱 연안국, 짜르 치하의 러시아까지 수출되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주조되는 에일로 포터를 기억해도 좋을 것입니다.

      포터의 기원은 18세기로 넘어가던 시기 런던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쓰리쓰레즈(Three treads)라는 맥주를 즐겨 마셨는데, 그것은 페일 에일, 브라운 에일, 스테일 에일을 혼합한 것으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페일 에일과 스테일 에일은 모두 컨트리 브루어(country brewers)가 독점적으로 런던 상업부에 납품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상당한 비용과 이익이 오고 가는 거래였습니다. 그들이 런던내의 페일 에일과 슽테일 에일을 독점하게 된 데에는 법적인 규제와 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습니다. 런던은 당시 시내에서의 석탄 사용을 규제하고 있었습니다. 페일 몰트는 석탄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런던시의 관할권 밖에 있었던 컨트리 브루어들은 페일 몰트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런던 양조업자들한테서 신선한 브라운 에일을 사다가 대형 오크통에 1년 또는 그 이상을 저장해서 스테일 에일을 얻었습니다. 장기간 숙성된 에일은 야생 이스트와 미생물의 영향으로 신맛의 젖산 특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맛을 당시 사람들은 잘 숙성된 맥주의 좋은 성질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런던의 양조업자들은 대부분 조그만 펍이나 선술집에 기반하고 있어서 대형 오크통을 마련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페일 에일과 스테일 에일의 공급으로 컨트리 브루어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런던의 양조업자들은 이러한 불공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싶어했습니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쓰리쓰레즈의 대체품으로 내놓은, 아무것도 섞지 않은 브라운 에일은 거친 맛 때문에 애주가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을 컨트리 브루어가 만든 페일 에일을 구해다가 섞어 마셨습니다.

      런던 양조업자들을 위한 전환점은 1722년 찾아왔습니다. 랄프 하우드라는 상업적인 양조업자가 엔타이어 버트(Entire butt)라는 술을 만들었는데, 맛이 진짜(쓰리 쓰레즈)와 흡사했습니다. 그는 맥주를 캐스크 1통(butt) 단 위로 이스트 런던의 퍼브에 공급했습니다. 당시 퍼브의 주인들은 쓰리 쓰레즈를 만드느라 고역을 치뤄야 했습니다. 지하저장고에서 세가지 맥주를 섞는 것만 해도 중노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엔타이어는 이러한 수고를 덜어주었습니다.
      섞을 필요가 없이 캐스크 단위로 포장돼서 편리했습니다. 더구나 엔타이어는 값이 훨씬 쌌기 때문에 맛과 가격과 편리함으로 쓰리 쓰레즈의 훌륭한 대체품이었습니다. 런던 선술집 주인들의 반응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특히 싼 값은 새로운 맥주의 대중적인 확산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랄프 하우드가 처음으로 엔타이어를 만든지 4년 후 런던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고국으로 부치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1726년 11월 26일 : 이 나라에선 맥주 밖에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맥주는 여러 가지 품질로 나뉘어 진다. (중략) 또 다른 종류는 포터로 불린다. (중략) 이 맥주의 대부분을 노동자 계층이 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하고 독한 맥주로 지나치게 마시면 효과가 와인과 맞먹는다. 포터는 1포트에 3펜스이다. 런던에 있는 많은 에일 하우스들이 이 맥주 외에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중략) 페일 에일은 1병에 1실링에서 1실링 6펜스이다." 페일 에일은 빈곤한 노동자 계층이 즐기기에는 너무 버거운 사치였습니다.

      포터는 런던의 새로운 맥주에 주어진 별명이었습니다. (랄프의 엔타이어 버트는 물론 그 이후 등장한, 유사한 섞은 맥주를 통칭함) 포터의 주 고객은 당시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과 함께 증가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이었습니다.
      빠르게 증가하는 노동자 계층의 맥주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1730년대에 이르면 이미 런던의 작은 선술집이나 랄프 하우드와 같은 작은 상업적 양조업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산업이 양조업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본을 갖고 있는 기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포터를 위한 양조장을 새로 지었고, 새로운 양조장은 산업혁명의 신기술과 과학적 진보로 무장했습니다. 최초의 기업가는 사무엘 휘트블드였는데, 그는 1742년 올드 스트리트에 소규모의 양조장을 세운 이후 3년 이내에 바비칸에 대규모의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1812년 생산량을 보면 당시 포터가 만들어낸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휘트브레드 2세는 년간 122,000 배럴을 생산하고 있었고, 바클레이 퍼킨스는 270,000 배럴, 뮤 레이드는 180,000 배럴, 트루만 핸버리는 150,000 배럴을 생산했습니다. 대략 1세기 전 랄프 하우드가 21,000 배럴을 생산한 것과 비교하면 혁명적이라 할만 했습니다.
      더 이상 포터는 작은 선술집에서 만든 술이 아니라, 그것은 신기술과 과학의 산물이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이었습니다. 자본에 의해 도시에 수용된 노동자 계층이라는 산업 시대의 새로운 계급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18세기의 포터는 페일과 브라운 몰트로 만든 색이 짙은 맥주였습니다. 색의 짙은 정도는 다양했는데, 여러 맥주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몰트의 단맛이 강해 호프가 많이 들어갔는데, 몰트의 단맛이 강했던 건 초기에 포터가 당의 알코올 전환도가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몰트 당이 그대로 맥주에 남는 것을 뜻했지만 남은 당은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 계층에게는 잃어버린 에너지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알코올 강도는 측정된 것이 없지만 대략 부피로 6%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보다 더 강한 버전은 '스타우트 포터(Stout poter)'로 알려졌습니다. 스타우트라는 표현은 18세기 당시 양조장에서 만든 가장 독한 술을 일컫는 말로 색깔과는 무관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포터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쇠퇴하고 가장 강한 포터만이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강한 포터를 가리키던 스타우트(포터)가 당신의 맥주 특성과 함께 하나의 맥주 종류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쓰는 스타우트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검은색의 포터가 등장한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양조업자들은 브라운 몰트보다 페일 몰트를 이전보다 많이 사용했습니다. 발효성 당이 나무로 건조한 브라운 몰트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페일 몰트는 색이 옅기 때문에 짙은 색을 연출하기 위해 다른 첨가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러저러한 첨가물들을 쓰던 중 해결 방법이 나왔는데 그것은 1817년 다니엘 휠러가 만든 몰트 건조기였습니다. 그의 새로운 건조기는 커피 볶는 기계의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덕분에 약 210도의 고열로 몰트를 건조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몰트는 짙은 갈색 또는 검은색을 띠었는데, 발효성 당이 거의 없었으나 소량만 첨가해도 맥주를 신비하게 변화시켰습니다. 항상 일정하게 검은 색깔을 내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운 맛이 추가되었습니다. 약간의 훈제한 듯한 맛과 함께 쓴 초콜릿과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포터나 스타우트를 마실 때 기대하는 맛이었습니다.
      특허 몰트(Patent malt)로 불린 새로운 몰트는 포터 양조산업 역시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휘트브레드는 휠러의 건조기가 발명되자마자 그 잠재력을 간파했습니다. 1817년 그 해 전문 몰트 제조사인 프렌치 & 주프사는 바비칸 양조장 바로 옆에 특허 몰트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그날 그날 양조장에 특허 몰트를 공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클레이 퍼킨스는 1820년부터 색을 내는 첨가물 대신 다크 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반 포터는 오늘날의 모습을 완성합니다. 여러 가지 맥주를 섞어 만들어서 색과 맛이 다양했던 포터는 이제 하나의 매쉬(Mash)에서 만든 검은 맥주가 되었습니다. 또한 섞을 때와는 달리 잘 숙성된 맛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볶은 곡식과 많은 양의 호프를 사용해서 쓴맛과 함께 호프와 다크 몰트의 맛을 띠었습니다.
      포터 양조는 런던 안에 머물러 있기엔 너무나 큰 사업이었습니다. 런던에서 만들어진 포터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수출되었고, 그 지역에서의 포터 생산을 자극했습니다. 런던 양조업자들의 진출은 인근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드레일(Thrale) 양조장을 선두로 많은 양조업자들은 발트해 연안국들과 러시아에 수출용으로 만든 강한 포터를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에서 폴란드의 단찌히(Danzig)까지 그리고 거기서 발트해를 경유해서 러시아에 이르는 긴 여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수출용 포터는 인기가 좋아 짜르(Tsars)의 궁정에서도 즐기는 맥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 군대에도 공급되어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클레이 퍼킨스의 스타우트는 러시아 왕가의 공식적인 품질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상표를 '러시안 임페리얼'로 지었는데, 그의 퐅는 매우인기가좋아서 에스토니아에 발트해 지역을 위한 별도 양조장을 세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바클레이의 맥주는 오늘날 커리지 임페리얼 스타우트로 생산됩니다.
      한편 런던으로부터 유입되는 포터에 자극받은 아일랜드의 양조업자들은 런던의 양조 기술자들을 고용해 생산기술을 배웠고 포터 생산에만 매달렸습니다. 지역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합병하기도 했습니다. 

      아일랜드의 양조산업 :: 기네스

      아일랜드의 양조산업은 특히 양조업자들이 런던에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포터를 막으려고 하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코크와 더블린을 통해 들어오는 브리스톨 양조장의 맥주 역시 대상이었습니다. 아서 기네스는 1756년 킬데어 카운티에 있는 작은 양조장을 사들였습니다. 3년 후 그는 더블린으로 가서 버려진 양조장을 임대해서 썼는데 1787년 당시 기네스는 에일과 포터를 모두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799년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에일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포터 생산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코크에는 벨파스트 출신의 윌리엄 비미쉬와 윌리엄 크로포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쇠고기와 버터를 팔기 위해 코크에 들렀다가 우연히 매년 60,000 배럴에 이르는 영국 포터가 코크향을 통해 수입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그들은 양조를 하기로 결심했고 1792년 부지를 사들였습니다. 비미쉬-크로포드와 기네스의 사업은 모두 대성공이었습니다. 19세기 경에는 두 회사는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내에서 가장 큰 회사였고, 비미쉬는 연간 100,000 배럴을 생산했으며  기네스는 66,000배럴을 생산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아일랜드 대기근에 이은 경기 후퇴는 유럽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었고 비미쉬와 기네스 역시 거래의 반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때 이후로 비미쉬는 과거의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지 못했지만 기네스는 사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수로와 새로 놓인 철도를 이용한 내수 시장 개척과 영국 본토와 식민지로의 공격적인 수출 정책을 능란하게 이용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기네스


      아일랜드가 산업화의 길고 고통스런 과정을 시작했을 때 기네스는 도시의 새로운 노동자 계층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국에 걸쳐 대리점과 병입 가게를 세움으로써 도시 이외의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갓 양조된 포터는 캐스크에 담겨 바지선(Barge)에 실렸고 수로를 따라 운송되면서 숙성되었습니다. 회사의 대리점에 도착하면 드라프트 또는 병의 형태로 바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기네스의 두 개의 주요 맥주는 캐스크에 표시된 엑스(X)로 구분되었고 엑스 1개는 보통 플레인으로 부르는 포터였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주로 마시고 리버풀의 아일랜드인 공동체에서 마셨습니다. 엑스 2개는 스타우트 포터 또는 더블 스타우트를 의미했는데 이는 수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서 기네스의 아들, 아서 2세는 아버지의 사업을 확장했고, 맥주 레시피를 약간 바꾸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세금이 알코올 강도가 아니라 몰트에 부과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런던 정부에 세금을 내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아서 2세 역시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몰트로 만들지 않은 곡식과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볶은 보리를 섞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태워서 검게 만든 보리의 강한 쓴맛은 맥주에 독특한 볶은 맛과 쓴 과일 맛을 더했습니다. 드라이 아이리쉬 스타우트로 알려진 스타일은 이렇게 등장했고, 곧이어 다른 양조업자들이 기네스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포터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게 되었을 때, 기네스의 더블 스타우트는 영국에서 만든 색이 짙은 맥주에 비해 아주 다른 종류의 맥주를 보였습니다. 아서 2세는 또한 식민지 시장을 위해 강하고 호프를 잔뜩 집어넣은 맥주를 개발했는데, 바로 포린 엑스트라 포터 스타우트였습니다. 후에는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로 불렸습니다.


      기네스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1885년에서 1906년까지, 생산량은 116,425배럴에서 778,598배럴로 증가했습니다.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조장은 1870년대에 다시 지어 세기 말 경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양조장이 되었습니다. 기록은 나중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새로운 양조장들에 의해 깨졌지만 여전히 기네스는 세계 양조산업에 강자로 남아있습니다.
      1차 대전 동안 영국 정부는 맥주 양조를 엄격히 규제했는데, 알코올 강도는 낮게 해야 했고 양조업자들은 많이 건조한 다크 몰트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코크스와 가스가 군수산업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인디아 페일 에일의 등장으로 이미 쇠퇴하고 있었던 포터는 자유 낙하 상태의 공처럼 곤두박질쳤습니다. 자치운동이 본격화하기 직전의 아일랜드에 영국인들은 그러한 가혹한 규제를 부과할 수 없었습니다. 알코올 강도는 낮아 졌지만 영국에서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보리와 몰트는 계속해서 페일 몰트와 다크 몰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이리쉬 스타일은 번창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명확한 스타일로 그리고 독립 국가 아일랜드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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