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의 숲

삶을 그리는 즐거운 언어학.

  • 2025. 5. 1.

    by. banan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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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의미를 찾아서

       

      1.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일까?

      “언어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단지 외부와의 소통만을 위한 기능이라면, 왜 우리는 마음속에서도 끊임없이 말을 걸고,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가?

      오늘의 주제는 조금 더 내면으로 향합니다.
      “언어는 어떻게 ‘나’를 형성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인간 존재론에 깊숙이 걸쳐 있는 탐색입니다.

       

       

      2. 유아기의 언어와 자아의 탄생

      언어 이전의 나 =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
      아기는 처음에는 울음, 몸짓, 표정 같은 비언어적 신호로 세계와 소통합니다. 하지만 생후 몇 개월이 지나고, 단어를 습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는 조금씩 세계를 이름 붙이고, 구분하며, ‘나’와 ‘타인’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자아의 형성이 “거울 단계”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외부에서 인식하는 순간, 즉 자기를 하나의 '대상'으로서 파악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자신에게 고정된 단어가 있음을 인지합니다.
      • 언어를 통해 나 = 고정된 주체라는 환상이 형성됩니다.
      • 이때부터 자아는 타인의 언어와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3. 언어가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일 수 있다
      많은 인지과학자들은 우리가 언어 없이는 추상적 사고를 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외롭다", "나는 불안하다"라는 감정은 언어를 통해 명명됨으로써 비로소 인식됩니다. 언어는 마치 마음속 안개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붓과 같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언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아를 성찰하는 모든 시도—자기소개서 쓰기, 일기 쓰기, 심리상담 등—은 결국 언어를 매개로 합니다. 우리는 말하고, 쓰면서 나라는 존재를 탐색하고 구성합니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이것을 "서사적 자아(narrative self)"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개체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4.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의 명제를 다시 읽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문장을 통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이성적 사고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현대 철학자들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은 언어 없이 가능한가?

      언어심리학자 비고츠키(Vygotsky)는 “생각은 언어를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내면화된 언어—즉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행위가 곧 사고이며, 이것이 자아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사고를 가능케 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를 넘어서, 존재 자체가 언어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는 철학적 선언입니다.

       

       

      5. 언어로 구성된 자아의 덧없음

      그러나 이 결론은 언어에 대한 신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로 만들어진 자아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흔들리기 쉬운 허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때때로 타인의 말, 사회적 기준, 언어적 구조에 의해 구성되고 억압됩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남들이 내게 말해준 존재인가?”
      이 질문은 자아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언어로 구성된 사회적 정체성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던져줍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권력 구조와 담론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자아의 형성조차도 제도적 언어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6. 자아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자아는 단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재구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말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며, 새로운 표현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 시인은 언어의 규칙을 파괴하며 자아를 해체합니다.
      • 작가는 다양한 자아를 창조하며 타인의 입장이 됩니다.
      • 상담자는 언어로 왜곡된 자아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언어를 통해 자아를 넘어서려는 시도, 즉 언어적 해방의 여정입니다.

       

      언어는 자아를 구성하고, 해체하고, 다시 빚는다

      우리는 언어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사회 속 위치를 정합니다. 그러나 언어는 고정된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흐르고, 흔들리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러므로 자아 역시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서사입니다.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다르게 말함으로써,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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